비정규교수에게 스승의날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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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5-15 13:05 조회718회 댓글0건본문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스승의 날 기념 성명서>
비정규교수에게 스승의 날이란 무엇인가
스승의 날이란 무엇인가.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되새기고 그 은혜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비정규교수에게 스승의 날이란 무엇인가. 강의실에 들어가면 학생들에게 다른 스승들처럼 학문의 규율과 지식의 역할을 논하지만, 강의실만 벗어나면 대학 교정을 유령처럼 떠돌아야 하는 비정규교수에게 스승의 날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제삿날을 맞이한 귀신처럼 더 서러워지는 날이다.
스승의 날을 맞아 각별히 더 서글퍼지는 비정규교수들이 힘을 내어 여기 모인 것은 우리들끼리 초라하게라도 스승의 날을 위로해보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서러움은 당초 우리 몫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고등교육기관에서 교육과 연구의 절반을 감당하고 있는 교원이며, 교육 노동을 통해 생계를 꾸려야 하는 노동자이고, 무엇보다 사람이다. 스승이며 교원이고 노동자인 우리들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조차 대접하지 않는 정부와 대학에게 이 모든 서러움을 되돌려주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다.
대학의 연구와 교육은 우리 사회의 미래 비전과 현실 대처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공동체가 부여한 고등교육의 필수 기능이다. 정부는 공동체의 요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본 예산과 인프라를 제공해야 하고, 대학은 연구와 교육의 공공성을 확보하여 공동체에 보답하여야 한다. 정부가 자기 의무를 방기하는 사이 고등교육은 밖으로 망가지고, 대학이 자기 역할을 망각하는 사이 고등교육은 안으로 곪아 왔다.
역대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구하며 대학에 시장논리를 밀어붙이기도 했지만, 윤석열 정부와 이주호 교육부는 더욱 저돌적으로 극우 정책을 쏟아부으며 고등교육 공공성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으려 하고 있다. ‘라이즈사업’과 ‘글로컬대학육성사업’을 도입하여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 책무를 지방자치단체에 떠넘기고, ‘대학설립운영규정’을 개정하여 대학이 영리업체로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교육과 연구의 절반을 감당하고 있는 비정규교수의 처우 개선을 위해 과거 정부에서 동냥처럼 쥐어주던 ‘강사처우개선사업비’ 같은 예산은, 이번 정부에서 고민도 없이 전액 삭감되었다.
대학들은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채, 조변석개하는 정부 정책과 시장 흐름에 적응하려는 근시안적 태도로 일관해 왔다. 정부가 압박하면 ‘총장직선제’를 폐지하고 ‘취업률 낮은 학과’를 통폐합해 왔다. 다국적 자본가들이 ‘4차산업혁명’을 호도할 때 그것을 백년교육의 아젠다처럼 떠받들더니, ‘메타버스’가 유행하자 세상이 온통 가상세계로 빨려들어갈 것처럼 방정을 떨고, 또 시들해지니 '챗GPT'로 몰려간다. 결국 강의실이 공허해지며 대학생들이 학문의 길을 잃어버렸고, 대학원생들은 해외석학을 찾아 떠나 학문생태계의 순환을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교육과 연구가 망가지는 것보다 대학의 재정수입이 더 중요하게 보이는 대학본부의 근시안들에게, 생존의 기로에 서 있으면서도 연구와 교육의 기본을 포기할 수 없어 버티는 비정규교수들은 그저 착취하기 좋은 먹잇감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서럽지만 우리는 스승이다. 정부와 대학이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는 것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고 우리 비정규교수마저 역할을 잊는다면, 우리나라의 교육과 연구가 당장 붕괴될 것을 알고 있고,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찾을 곳이 아주 사라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스승이다. 그래서 서럽지만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서러움은, 우리 사회의 힘없는 시민들이 겪는 서러움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탓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이고 교원이다. 그리고 스승이다. 방학중임금이니, 대학혁신지원사업비니, 겸초빙사용사유준수니, 주5시간소정근로시간이니, 퇴직금, 직장건강보험적용 따위의 말들을 더 길게 얹지는 않겠다. 서러운 날 구질구질해지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서러운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더이상 우리를 벼랑으로 내몰지 말라.
2023년 5월 15일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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